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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의 업적과 수학사적 의의

유클리드가 태어나 살았던 기원전 300년 전. 후의 고대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학문이 각 분야별로 분화되지도 않았고, 학문의 명확한 체계가 확립된 시대가 아니었다. 즉 개별학문별로 그 내용과 형식 면에서 연구의 대상과 연구의 방법론, 연구의 범위 등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당시의 시대분위기와 고대 그리스의 시대 상황은 철학이 모든 학문의 정점에 있었던 시기이고, 학문 뿐만 아니라 모든 사고의 관점이 철학적 인식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 졌었다. 즉 학문연구의 풍토는 다분히 인문학적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의 분과 학문이 다른 학문분야와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독자적인 학문의 체계로 발달되기 위해서는 연구의 대상, 연구의 방법론, 연구범위 등이 정확하게 정립되고,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경 ‘기하학원론’을 저술하였고, 이 저술에서 그 동안 선대의 연구자들이 발견한 중요한 기하학적 사실을 체계적인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유클리드는 그때까지의 연구자들과 달리 기하학의 논리전개에 필요한 다섯 개의 ‘명제 또는 공준(公準)’과, 크기의 문제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다섯 개의 ‘AXIOM공리(公理)’에 기초를 두고서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유클리드는 먼저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한 이후에, 어떤 특수한 도형의 특수한 성질이 아닌 일반적인 도형의 일반적인 성질을 하나씩 ‘정리(定理)’로서 증명해 나가는 방식으로 풀이를 해 나가고 있다.

즉 유클리드의 업적 및 수학사적 의의는 유클리드가 당대까지의 기하학 및 기타의 수학적 연구결과와 업적을 정리하여 이를 ‘기하학원론’으로 정리. 집대성한 것과 ‘기하학원론’이라 불리우는 저술의 독창성, 새로운 발명. 발견에 있다기 보다는 ‘공준’과 ‘공리’와 같은 명제로부터 수학의 논의를 전개해 나아감으로써 수학의 내적 모순과 경험과 직관을 탈피한 방법론적 기초를 닦은 것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기하학원론’의 내용적 측면에서의 탁월성이나 우수성의 가치가 없어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니며 수학사적 관점에서는 기하학원론 그 자체보다는 그 방법론에 대한 가치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업적과 수학사적 의의

수학이란 본래 어느 정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학문일 수 밖에 없다. 관철과 경험에 의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수의 세계와 수의 원리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수학이 처음 태동하고, 특히 수학이 철학에서 명확히 분화, 구분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더욱더 그런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을 실제적인 생활상의 기술 즉, 공학 및 자연과학의 문제, 천문학 등의 문제로 그 응용방법과 응용영역을 넓혀 단순히 관념적인 이론의 영역이 아닌 실천적인 학문으로서의 성격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아르키메데스는 유체 속에서 물체의 부피, 질량을 구하는 문제와 같은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수학의 연구와 응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원주율, 원과 구의 궤적, 부피와 같은 문제라든가 포물선, 나선 등의 형태로 폐쇄된 영역의 부피와 면적 등을 계산하는 방법에 대한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후에 페르마 등이 고대 그리스 수학을 연구하면서 미. 적분을 발견하게 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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